페루초 부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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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루초 부소니는 1866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교육자, 편집자이다. 7세에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여 신동으로 불렸으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연주 활동을 펼쳤다. 바흐의 작품을 피아노 연주에 맞게 편곡하고, 독자적인 미학을 담은 에세이를 저술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부소니는 낭만주의 음악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흐름을 수용하여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으며, 그의 음악은 현재까지도 연주되고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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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초 부소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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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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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 엔폴리 |
사망지 | , 베를린 |
직업 | 작곡가 편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교육자 |
장르 | 클래식 음악 |
2. 생애
이탈리아 엠폴리에서 태어났으며[126][127], 피아니스트 어머니와 클라리넷 연주자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은 주로 트리에스테에서 보냈다[128].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아 7세에 데뷔했으며, 빈에서 활동하며 프란츠 리스트, 요하네스 브람스, 안톤 루빈스타인 등 당대 거장들과 교류했다. 특히 리스트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표하며 "리스트의 피아노 곡은 피아노 예술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라고 찬사를 보냈고[130], 그의 작품을 연구하고 편곡하기도 했다. 다만 리스트는 부소니의 연주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해진다[129].
초기부터 작곡에 두각을 나타내 13세에 《24개의 전주곡》 Op.37 등을 작곡했으나, 스스로는 소년기 작품의 완성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후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슈튀크》Op.31a로 안톤 루빈스타인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우승하며 젊은 작곡가로 인정받았다.
이후 헬싱키, 모스크바, 미국 등지에서 교수 및 연주 활동을 펼쳤고, 1894년 베를린에 정착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시기를 제외하고는 이곳을 주요 활동 기반으로 삼았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교육자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며 피아노 협주곡, 오페라 《아를레키노》, 《투란도트》 등 중요한 작품들을 남겼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중립국 스위스 취리히에 머물며 활동을 이어갔고, 오페라 《닥터 파우스트》 작업에 몰두했다.
전후 1920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마스터 클래스를 열고 후학을 양성했으나, 건강 악화로 1924년 《닥터 파우스트》를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2. 1. 초기 생애 (1866-1888)
페루초 단테 미켈란젤로 벤베누토 부소니는 1866년 4월 1일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엠폴리에서 클라리넷 연주자인 아버지 페르디난도 부소니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안나 바이스-부소니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126][127] 어머니는 트리에스테 출신으로 유대계 혈통이었다.[128]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은 트리에스테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신동이었던 부소니는 주로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는데, 훗날 자서전적 메모에서 "아버지는 피아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리듬감도 불안정했지만, 이러한 단점들을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 엄격함, 그리고 꼼꼼함의 조합으로 보완했다"고 회고했다.[2] 그는 7세 때인 1873년 11월 24일, 트리에스테의 실러-페라인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부모님과 함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6번 (다장조) 1악장과 슈만, 클레멘티의 작품을 연주하며 피아니스트로 공식 데뷔했다.[131][3] 이후 부모님의 상업적 홍보 아래 여러 연주회를 열었으나, 부소니 자신은 이 시기에 대해 "나는 어린 시절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132][4] 1875년에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을 연주하며 협주곡 연주자로도 데뷔했다.[133][5]
9세부터 11세까지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빈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빈에서의 첫 연주는 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로부터 호평을 받았다.[134][6] 1877년에는 프란츠 리스트의 연주를 직접 듣고 그에게 소개되었으며, 리스트의 기량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135][7] 부소니는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리스트의 피아노 곡은 피아노 예술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찬사를 보냈고, 훗날 리스트의 작품을 교정하고 편곡하기도 했다.[130] 1878년에는 피아노와 현악 4중주를 위한 4악장 협주곡을 작곡했다. 빈을 떠난 후 잠시 그라츠에서 빌헬름 마이어와 함께 공부했으며, 마이어는 부소니의 초기 작품인 ''스타바트 마테르''(작품 55번, BV 119, 현재 분실됨)를 1879년에 지휘했다.[8] 이 시기에 ''아베 마리아'' (작품 1, 2; BV 67)를 비롯한 몇몇 초기 피아노 작품들이 출판되었다.[6] 13세에는 《24개의 전주곡》 Op.37을 완성했지만, 부소니 자신은 이 시기 작품들의 완성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881년, 부소니는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하모니카 회원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모차르트 이후 최연소 기록이었다.[136][9] 1880년대 중반에는 빈에 거주하며 카를 골드마르크를 만나 그의 1886년 오페라 ''멀린''의 성악 악보 준비를 도왔다.[6] 또한 요하네스 브람스를 만나 그에게 두 세트의 피아노 연습곡을 헌정했으며, 브람스는 부소니에게 라이프치히에서 카를 라이네케와 함께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137][6] 이 기간 동안 부소니는 독주회를 열고 후원자 테데스코 남작 부인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작곡 활동도 꾸준히 이어가 1886년부터 1889년까지 첫 오페라 ''시군(Sigune)'' 작업에 매달렸으나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포기했다.[138][10]

라이프치히에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기도 했다. 돈이 떨어져 출판업자 슈발름에게 작품을 받아달라고 간청했는데, 슈발름은 망설이다가 페터 코르넬리우스의 오페라 ''바그다드의 이발사''를 주제로 한 환상곡을 작곡하면 선금 50 마르크를 주고 완성 시 100마르크를 더 주겠다고 제안했다. 부소니는 다음 날 아침 바로 완성된 악보를 들고 슈발름을 찾아가 150마르크를 요구하며 "나는 피아노도 없이, 오페라 내용도 미리 알지 못한 채 밤 9시부터 새벽 3시 30분까지 작업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139][11]
부소니는 1888년 헬싱키에서 처음으로 교직을 맡게 되었고, 그곳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예르다 셰스트란드(Gerda Sjöstrand)를 만났다.
2. 2. 헬싱포르스, 모스크바, 미국 (1888-1893)

1888년, 음악학자 휴고 리만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헬싱포스(현재 핀란드 헬싱키)의 음악원 원장 마르틴 베겔리우스에게 부소니를 고급 피아노 강사로 추천했다. 이는 부소니가 처음으로 얻은 정식 직책이었다.[12] 헬싱포스에서 그는 지휘자이자 작곡가 아르마스 예르네펠트, 작가 아돌프 파울, 그리고 평생 친구가 된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 등과 교류했다.[13] 당시 아돌프 파울은 부소니를 "밤색 수염에 회색 눈을 가진 작고 날씬한 이탈리아인으로, 젊고 쾌활하며, ... 두꺼운 예술가적 컬 위에 작은 둥근 모자를 자랑스럽게 쓰고 있었다"고 묘사했다.[14]
1888년부터 1890년까지 부소니는 헬싱포스에서 약 30회의 피아노 독주회와 실내악 연주회를 열었다.[15] 이 시기에 작곡한 작품 중에는 피아노 듀엣을 위한 ''핀란드 민요 세트'' (Op. 27)가 있다.[16] 1889년 라이프치히 방문 중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 라단조(BWV 565) 오르간 연주를 듣고, 제자 카티 페트리(훗날 에곤 페트리의 어머니)의 권유로 이를 피아노로 편곡하기 시작했다. 부소니 연구가 에드워드 조셉 덴트는 이것이 부소니 편곡의 시작일 뿐 아니라, 그만의 독창적인 피아노 터치와 기법 스타일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했다.[17] 같은 해 3월 헬싱포스로 돌아온 부소니는 미래의 아내가 될 게르다 셰스트란트(스웨덴 조각가 칼 에네아스 셰스트란트의 딸)를 만나 일주일 만에 청혼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Kultaselle''("사랑하는 이에게", BV 237)를 작곡했다.[18]
1890년, 부소니는 바흐의 두 부분 및 세 부분으로 된 ''인벤션'' 편찬본을 출판했다.[19] 같은 해, 그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Konzertstück''("연주회 소품"), Op. 31a (BV 236)로 제1회 안톤 루빈스타인 콩쿠르에서 작곡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안톤 루빈스타인 자신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시작한 것이었다.[20] 이 수상 덕분에 부소니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직에 초빙되었다. 게르다도 모스크바로 와서 그와 결혼했다.[21] 모스크바에서의 첫 콘서트에서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을 연주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러시아 동료들과의 관계 및 재정적, 직업적 문제로 인해 모스크바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22]
이때 윌리엄 스타인웨이로부터 미국 보스턴의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직을 제안받자 부소니는 이를 수락했다. 특히 당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1876년 빈에서 함께 연주한 경험이 있는 아르투르 니키슈였던 점도 영향을 미쳤다.[22] 1891년부터 미국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1892년 보스턴에서 첫 아들 베네벤토(베니)가 태어났다. 그러나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의 생활 역시 만족스럽지 못했고, 1년 후인 1893년 교수직을 사임하고 미국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연주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23]
2. 3. 베를린 정착과 활동 (1894-1913)
1893년 4월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의 베를린 초연을 관람한 것은 부소니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전까지 독일 전통, 특히 브람스나 리스트, 바그너의 영향을 중시했던 그는 이탈리아 음악 전통의 가능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24][149] 부소니는 베르디를 "이탈리아 최고의 작곡가"이자 "우리 시대 가장 고귀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칭하며, ''팔스타프''가 자신의 예술 인생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생각했다.[25][150] 1894년, 부소니는 베를린에 정착하여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을 제외하고는 이곳을 주요 활동 기반으로 삼았다.베를린은 부소니의 활발한 연주 활동을 위한 좋은 거점이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피아니스트로서 유럽 각지와 미국을 오가며 힘들지만 보수가 좋은 연주 여행을 계속해야 했으며, 수입의 상당 부분을 부모에게 보냈다.[33] 초기에는 그의 연주 프로그램이나 스타일이 일부 지역에서 논란을 낳기도 했다. 1897년 런던 데뷔 연주회는 엇갈린 평가를 받았는데, ''The Musical Times''는 바흐 오르간 작품 편곡 연주를 비판하면서도 쇼팽 에튀드 (Op. 25) 연주는 흥미로웠다고 평했다.[34][151] 파리에서도 리스트 작품 연주 시 반음계 구절을 임의로 추가한 것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35] 그러나 부소니의 국제적 명성은 빠르게 높아져 베를린을 비롯한 유럽 주요 도시(맨체스터, 버밍엄, 마르세유, 피렌체 등)와 1904년부터 1915년 사이 네 차례의 미국 방문을 통해 활발히 연주 활동을 펼쳤다.[36] 음악학자 앤터니 보몬트는 1911년 베를린에서 열린 리스트 독주회 시리즈를 부소니 피아니즘의 정점으로 평가하기도 한다.[38]
이처럼 바쁜 연주 활동은 그의 작곡 활동에 어느 정도 제약을 주었다. 1896년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작곡가는 현재 숨어있다"고 쓰기도 했다.[39][152] 그럼에도 이 시기에 그의 중요한 작품들이 탄생했다. 5악장 구성에 연주 시간이 1시간이 넘고 무대 뒤 남성 합창단까지 포함하는 기념비적인 피아노 협주곡 (BV 247)을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작곡했다.[40][153] 1904년과 1905년에는 카를로 고치의 희곡 ''투란도트''를 위한 부수 음악으로 ''투란도트 모음곡'' (BV 248)을 작곡했다.[41][154] 또한 E. T. A. 호프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Die Brautwahl'' (신부 선택, BV 258) 작곡에 착수하여 1912년 베를린에서 초연했다.[42][155] 이 외에도 그의 성숙한 작곡 스타일을 보여주는 피아노 독주곡들, 예를 들어 ''엘레지'' (BV 249, 1907), 모음곡 ''젊은이에게'' (An die Jugend|안 디 유겐트de, BV 252, 1909), 그리고 첫 두 개의 피아노 소나티네 (BV 257, 1910; BV 259, 1912) 등을 발표했다.[43][156]
부소니는 피아니스트로서뿐만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활동하며 당시 현대 음악 보급에 힘썼다. 1902년부터 1909년까지 베를린의 '베토벤잘'(Beethovensaal)에서 일련의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직접 기획하고 지휘(때로는 피아노 협연)했다. 이 콘서트 시리즈는 특히 독일 외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독일에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44][157] 에드워드 엘가, 시벨리우스, 세자르 프랑크, 클로드 드뷔시, 뱅상 댕디, 카를 닐센, 벨러 버르토크 등의 작품이 독일 초연되었다.[158] 또한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1904년, 카를 무크 지휘, 부소니 협연), ''투란도트 모음곡''(1905년), ''코미디 서곡''(1907년) 등 자신의 작품 초연 무대로도 활용했다.[45] 때로는 샤를-발랑탱 알캉이 작곡한 독특한 카덴차를 사용하여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는 등[46][159][47][160], 고전 작품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콘서트들은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보수적인 비평가들로부터 공격적인 비판을 받기도 했다.[48][161]
부소니는 교육 활동에도 힘썼는데, 정규 음악원 교수직보다는 마스터클래스를 선호했다. 1900년과 1901년에는 바이마르에서 카를 알렉산더 대공의 초청으로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 이때 제자 중에는 훗날 무용가로 유명해진 모드 앨런도 있었다.[49][162] 1907년에는 빈 음악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었으나, 음악원 측과의 마찰로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그나츠 프리드먼, 레오 시로타, 루이 그루엔베르크, 요제프 투르친스키 등 뛰어난 제자들을 배출했다.[50][163] 1910년 가을에는 바젤에서 마스터클래스와 독주회를 가졌다.[51][16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부소니는 음악계를 넘어 예술계 전반으로 인맥을 넓혀갔다. 1903년부터 서신을 교환하던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1911년 베를린에 정착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1913년에는 자신의 집에서 빌렘 멩엘베르크, 에드가 바레즈, 아르투르 슈나벨 등을 초청하여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 비공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52][165] 1912년 파리에서는 작가 가브리엘레 다눈치오를 만나 오페라나 발레 공동 작업을 제안받았고,[53][166] 미래주의 예술가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와 움베르토 보초니와도 교류했다.[54][167]
2. 4. 제1차 세계 대전과 망명 (1913-1920)

1913년 봄, 북부 이탈리아에서 콘서트를 마친 부소니는 볼로냐의 리세오 로시니(Liceo Rossini) 교장직을 제안받았다. 최근 베를린-쇠네베르크의 빅토리아-루이제-플라츠(Viktoria-Luise-Platz)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여름을 베를린에서 보낼 생각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볼로냐는 이사도라 던컨과 같은 유명 인사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다소 뒤처진 곳이었고, 부소니의 피아노 제자들은 재능이 부족했으며 지역 당국과의 마찰도 잦았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인 1914년 8월, 그는 미국 투어를 이유로 1년 휴가를 요청했고, 다시는 볼로냐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그의 유일한 영구적인 업적은 위생 시설을 현대화한 것이었다.[55] 이 시기 동안 그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또 다른 협주곡 작품인 ''인디언 판타지''(Indianische Fantasieger, BV 264)를 작곡했다. 이 곡은 다양한 미국 원주민 부족의 멜로디와 리듬을 기반으로 하는데, 부소니는 1910년 미국 투어 중 만난 그의 전 제자이자 음악인류학자인 나탈리 커티스 벌린(Natalie Curtis Burlin)에게서 받은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작품은 1914년 3월 베를린에서 부소니가 직접 피아노 독주자로 나서 초연했다.[56]
1914년 6월부터 1915년 1월까지 부소니는 베를린에 머물렀다. 당시 독일은 전쟁 중이었지만, 이탈리아는 아직 중립국이었기에 부소니는 초기에 전쟁 발발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오랫동안 구상해 온 오페라 ''닥터 파우스트''(Doktor Faustger)의 대본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1915년 1월, 그는 마지막 미국 콘서트 투어를 떠났으며, 이 시기에도 바흐 작품 편집 작업을 계속하여 자신의 버전으로 편곡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을 완성했다.[57] 부소니가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전하자, 그는 1915년부터 중립국인 스위스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부소니는 취리히에 정착하여 톤할레 오케스트라(Tonhalle Orchester Zürich)의 지휘자 폴크마 안드레아(Volkmar Andreae)와 작곡가 필리프 야르나흐(Philipp Jarnach) 등 현지 음악가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의 친구인 피아니스트 호세 비안나 다 모타(José Vianna da Motta)도 당시 제네바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안드레아는 부소니가 톤할레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58] 1915년 부소니를 만났을 때 23세였던 야르나흐는 부소니의 오페라 피아노 악보 준비 등을 도우며 그의 필수적인 조수가 되었고, 부소니는 그를 자신의 '파물루스'(famuluslat, 조수 또는 제자를 의미)라고 불렀다.[59] 미국에 머무는 동안 부소니는 ''닥터 파우스트'' 작업을 진척시키는 한편, 1막짜리 오페라 ''아를레키노''(Arlecchinoita, BV 270)의 대본을 썼다.[60] 그는 취리히에서 이 오페라를 완성했고, 극장에서 하룻밤 공연 분량을 맞추기 위해 이전에 작곡했던 ''투란도트'' 모음곡을 1막 오페라(BV 273)로 개작했다. 두 오페라, ''아를레키노''와 ''투란도트''는 1917년 5월 취리히에서 함께 초연되었다.[61] 취리히 시절 그의 제자 중에는 후에 미국에서 전자 음악의 선구자가 되는 오토 루닝(Otto Luening)이 있었다.
1916년, 이탈리아를 방문한 부소니는 미래주의 화가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를 다시 만나 그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그러나 몇 달 후 보치오니가 군사 훈련 중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부소니는 큰 충격을 받았고, 전쟁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62] 또한, 1907년에 출판했던 그의 저서 ''음악의 새로운 미학 스케치''(Entwurf einer neuen Ästhetik der Tonkunstger)의 확장판을 재발행하면서 독일의 보수적인 작곡가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와 격렬하고 긴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63] 부소니는 미분음악에 대한 실험도 계속했다. 미국에서 그는 하모니움의 일부 리드를 3분음 간격으로 조율했으며, "반음으로 분리된 두 줄의 음을 가진 3분음 시스템 이론을 연구했다"고 주장했다.[64]
전쟁 기간 동안 스위스에는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등 많은 예술가들이 망명해 있었지만,[65] 부소니는 점차 스위스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다시 영국, 파리, 이탈리아 등지에서 콘서트 투어를 시작했다.[66] 런던에서는 작곡가 카이호스루 샤푸르지 소라브지(Kaikhosru Shapurji Sorabji)를 만나 그가 헌정한 피아노 소나타 1번 연주를 들었다. 부소니는 그의 재능에 감명받아 추천서를 써주기도 했다.[67] 1920년, 그의 전 제자이자 당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문화부 관리였던 레오 케스텐베르크(Leo Kestenberg)가 베를린에서의 교직과 오페라 제작 지원을 약속하며 그를 초청하자, 부소니는 기꺼이 독일로 돌아갔다.[68]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작곡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으며, 쿠르트 바일(Kurt Weill), 에드가 바레즈(Edgard Varèse), 슈테판 볼페(Stefan Wolpe) 등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2. 5. 말년과 사망 (1920-1924)

제1차 세계 대전 중 볼로냐와 취리히에서 지낸 후, 부소니는 1920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빅토리아-루이제-플라츠 11번지에 있는 예전 아파트에 다시 정착했다.[69][174] 당시 그의 건강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으나, 콘서트 활동은 계속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페라 《파우스트 박사》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의 대본(리브레토)은 1918년 독일에서 이미 출판된 상태였다. 1921년 그는 "보이지는 않지만 들리는 지하 강처럼, 《파우스트》를 위한 음악은 내 열망의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포효하고 흐른다"라고 쓰며 작품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69][174]
당시 베를린은 바이마르 공화국 음악계의 중심지였고, 부소니의 작품들은 오페라를 포함하여 정기적으로 연주되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공연 활동을 이어갔으나, 독일의 하이퍼인플레이션 문제로 인해 영국 투어를 떠나야 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로서 그의 마지막 무대는 1922년 5월 베를린에서 연주한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이었다.[70][175]
베를린으로 돌아온 부소니는 작곡 마스터 클래스를 열어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그의 제자 중에는 쿠르트 바일, 블라디미르 포겔, 로베르트 블룸, 에드가 바레즈, 슈테판 볼페 등 훗날 유명 작곡가가 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71][176] 또한 취리히 시절에는 미국 전자 음악의 선구자가 되는 오토 루닝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 시기 부소니는 스트라빈스키, 지휘자 헤르만 셰르헨 등 당대의 여러 음악가들과도 활발히 교류했다.[71][176]
그러나 건강 악화와 과로가 겹치면서, 부소니는 1924년 7월 27일 베를린에서 결국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심부전이었지만, 신장병(신장 염증) 또한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72][177] 평생의 역작이었던 《파우스트 박사》는 미완성으로 남겨졌고, 그의 제자 필리프 야르나흐(Philipp Jarnach)가 완성하여 1925년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73][178] 부소니는 베를린에 안장되었다.
부소니가 살았던 베를린 아파트는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습으로 파괴되었고, 많은 소지품과 악보, 서류들이 소실되거나 약탈당했다. 현재 그 자리에는 그의 거주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아내 게르다는 1956년 스웨덴에서 사망했고, 두 아들 중 베니는 1976년 베를린에서, 삽화가였던 렐로는 1962년 뉴욕에서 사망했다.[74][179]
그의 작품들은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사를 통해 활발히 출판되었으나, 사후 상당수가 절판되어 잊혀졌다. 특히 젊은 시절 여러 출판사와 계약했던 탓에 작품 전곡을 모으기 어려웠으나, 래리 시츠키(Larry Sitsky)가 피아노 작품 전곡을 수집하여 저서를 출판하는 데 기여했다. 확인된 작품 수는 303곡에 달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일 분단으로 인해 자필 악보가 독일과 폴란드의 야기엘론 대학교 도서관 등에 흩어져 있어 아직 상당수가 미출판 상태로 남아있다.
3. 음악
이탈리아 엠폴리 출신[126][127]으로, 소년 시절은 주로 트리에스테에서 보냈다. 어머니 안나 바이스-부소니는 트리에스테 출신의 프로 피아니스트였고, 조부를 통해 유대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128]. 이탈리아인 아버지 페르디난도 부소니는 프로 클라리넷 연주자였다. 부소니는 음악 신동으로 7세에 부모와 함께 공개 연주회에서 데뷔했다. 몇 년 후 빈에서 자작곡을 연주했고, 프란츠 리스트, 요하네스 브람스, 안톤 루빈스타인과 같은 거장들을 만났다.[129] 특히 리스트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훗날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편곡하기도 했다.[130] 13세에 《24개의 전주곡》 Op.37을 완성하는 등 일찍부터 작곡 활동을 시작했지만, 스스로는 소년기 작품의 완성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후 안톤 루빈스타인 콩쿠르의 작곡 부문에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토슈튀크》 Op.31a로 우승하고 피아노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하며 젊은 음악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3. 1. 피아니즘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부소니의 연주를 리스트의 화려했던 시대 이후, 기교적 과시(it)를 넘어선 사색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평가했다.[75] 부소니는 젊은 시절 빈에서 리스트의 연주를 직접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7], 훗날 "리스트의 피아노 곡은 피아노 예술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극찬하며[130] 그의 작품을 교정하고 편곡하기도 했다.
부소니의 연주는 단순히 기교적인 면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헨리 우드 경은 부소니가 모차르트 협주곡에서 단선율로 쓰인 부분을 양손 옥타브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 놀라움을 표했다. 이에 대해 도널드 토비는 부소니를 "모차르트의 텍스트에 엄격하게 얽매이지 않는 절대적인 순수주의자"라고 평하며, 이는 모차르트 자신도 비슷한 자유를 누렸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덧붙였다.
부소니 자신은 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은 모든 맥락이 새로운 맥락이며 '예외'로 취급해야 합니다. 일단 찾은 문제의 해결책은 다른 맥락에 다시 적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술은 놀라움과 발명의 극장이자, 겉보기에 준비되지 않은 것입니다. 음악의 정신은 우리 인간성의 심연에서 솟아나 인간에게 내려온 높은 곳으로 되돌아갑니다."[75]
음악학자 퍼시 스콜스는 부소니를 "모든 표현 수단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한 구절에서 다른 구절, 그리고 전체 곡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절을 완전히 고려했기 때문에, 내가 들어본 모든 피아니스트 중 가장 진정한 예술가였다"고 평가했다.[76]
부소니는 상당한 수의 피아노 롤을 남겼으며, 이 중 일부는 LP 레코드와 CD로 재발매되었다.[120] 여기에는 쇼팽의 음악과 리스트 편곡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녹음이 부소니의 실제 연주 스타일을 얼마나 정확하게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의 동료와 제자 중 다수는 이 녹음들에 실망감을 표하며 부소니의 피아니즘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120] 그의 제자였던 에곤 페트리는 피아노 롤 녹음이 처음 음반으로 나왔을 때 "끔찍하다"며 부소니 연주의 희화화라고 비판했고,[121] 페트리의 제자이자 부소니의 연주를 직접 들었던 군나르 요한센 역시 리스트의 'Feux follets' 녹음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설득력이 부족하며, 특히 쇼팽 녹음은 명백한 부조화라고 지적했다.[122]
3. 2. 바흐 재해석
1894년, 부소니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피아노 음악을 편집한 첫 결과물인 《평균율 클라비어》 제1권이 베를린에서 출판되었다.[88] 이 판에는 "피아노를 위한 바흐 오르간 작품의 편곡에 관하여"와 같은 중요한 부록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30년 이상 이어질 바흐-부소니 에디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부소니는 직접 7권을 편집했으며, 여기에는 1890년판 《2성 및 3성 인벤션》도 포함된다.[89] 부소니는 또한 자신의 연주회 레퍼토리로 자주 활용했던 바흐 음악의 피아노 편곡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바흐의 오르간을 위한 일부 코랄 전주곡, 토카타와 푸가 라단조, 크로마틱 환상곡과 푸가 등이 있다.[91]
부소니의 편곡은 단순히 악보를 피아노로 옮기는 것을 넘어, 때로는 상당한 재창조를 보여준다. 하지만 원곡의 리듬 윤곽, 멜로디, 화성은 충실히 따른다.[92] 이는 연주자가 작곡가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자유롭게 표현해야 한다는 부소니의 음악 철학과 연결된다.[93] 그는 원본 악보에 템포 표시, 아티큘레이션 및 프레이징 표시, 다이내믹 및 메트로놈 표시를 추가하고 상세한 연주 제안을 덧붙였다. 예를 들어,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BV B 35) 판에서는 "연주회용"으로 8개의 변주곡을 생략하고 일부 구간을 대폭 수정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음악학자 케네스 해밀턴은 "마지막 네 변주곡은 바흐보다는 부소니 자신의 피아니스틱한 스타일이 강하게 드러나는 자유로운 환상곡 형태로 재작성되었다"고 평가했다.[94]
1909년 부친의 사망 후, 부소니는 그를 추모하며 《J. S. 바흐 이후의 환상곡》(BV 253)을 작곡했고,[95] 이듬해에는 바흐 음악을 기반으로 더욱 확장된 작품인 《대위법적 환상곡》을 발표했다.[95]
3. 3. 작품 세계
부소니의 작품 세계는 작곡, 편곡, 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있으며, 낭만주의 음악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면서도 20세기 초 현대 음악의 다양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그의 음악은 조성과 무조성, 전통적인 형식과 자유로운 형식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 어법을 탐구하는 실험 정신을 보여준다.음악학자 후고 라이히텐트리트는 1900년에 완성된 바이올린 소나타 2번 Op. 36a (BV 244)를 부소니의 초기 양식과 후기 양식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보았다.[79][180] 하지만 부소니 자신은 1909년에 작곡된 피아노 모음곡 ''젊은이에게'' (An die Jugend, BV 252)와 엘레지 중 '자장가' (Berceuse, BV 252/7, 나중에 BV 266으로 독립)를 기점으로 자신의 독립적인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여겼다.[80] 킨더만의 작품 목록(BV)에 따르면 1900년까지 이미 2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으나, 이 시기 작품들은 오늘날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81]
20세기 초반, 부소니는 연주 활동에 집중하며 창작 면에서는 다소 주춤한 시기를 보냈다.[83]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기념비적인 피아노 협주곡 (BV 247, 1901-1904)이 있다. 5악장 구성에 연주 시간이 1시간이 넘고 마지막 악장에는 남성 합창단까지 등장하는 대규모 작품으로[40], 주제가 여러 악장에 걸쳐 나타나 전체를 하나로 파악해야 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닌다.[84] 초연 당시 평단에서는 "소음과 기괴함의 극치"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181][85] 카를로 고치의 희곡을 위한 부수 음악으로 작곡된 ''투란도트 모음곡'' (Turandot Suite, BV 248, 1904-1905) 역시 이 시기의 주요 작품이다. 중국 및 동양적인 선율을 사용했지만, 라이히텐트리트가 지적했듯이 이는 서양 작곡가의 시각에서 재해석된 것이다.[182][86] 이 모음곡은 1905년 순수 음악 작품으로 초연되었고, 1911년 연극 제작에 사용되었으며, 결국 1917년 2막 오페라 투란도트 (BV 273)로 확장되었다.[183][87]
1907년경부터 부소니는 자신만의 성숙한 음악 어법을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라이히텐트리트는 이 시기 부소니의 양식이 시벨리우스, 드뷔시, 알렉산드르 스크랴빈, 쇤베르크와 공통점을 가지며, 특히 전통적인 장조와 단조 체계에서 벗어나 무조성으로 나아가는 경향에 주목했다.[194][106]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피아노를 위한 ''엘레지'' (Sieben Elegien, BV 249, 1907), ''젊은이에게'' (An die Jugend, BV 252, 1909), 그리고 첫 두 개의 피아노 소나티나 (Sonatina No. 1, BV 257, 1910; Sonatina No. 2, BV 259, 1912) 등이 있다.[43] 또한 E. T. A. 호프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신부 선택'' (Die Brautwahl, BV 258)을 작곡하여 1912년 베를린에서 초연했지만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다.[42]
바흐에 대한 깊은 존경심은 부소니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가장 규모가 큰 피아노 독주곡인 ''대위법적 환상곡'' (Fantasia contrappuntistica, BV 256, 1910)은 바흐의 ''푸가의 기법'' 중 미완성으로 남은 마지막 푸가를 바탕으로 작곡된 약 30분 길이의 대작이다. 이 곡에는 B-A-C-H 모티프를 비롯한 바흐 작품의 여러 선율이 사용되었으며, 부소니는 이 곡을 여러 차례 수정하고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버전으로도 편곡했다.[195][107]
부소니는 미국 원주민 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음악인류학자 나탈리 커티스의 연구에서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인디언 환상곡'' (Indianische Fantasie, BV 264, 1913)과 피아노 독주를 위한 두 권의 스케치 모음집 ''인디언 일기'' (Indianisches Tagebuch, BV 267, 1915)를 작곡했다.[196][108] 1917년에는 오페라 ''투란도트'' 개작과 함께 공연할 단막 오페라 ''아를레키노'' (Arlecchino, BV 270)를 작곡했다.[197] 그는 1916년부터 오페라 ''파우스트 박사'' (Doktor Faust, BV 303) 작업에 착수했으나, 1924년 사망할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이 작품은 그의 제자 필리프 야르나흐가 부소니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하여 1925년 초연되었다.[197][109] 이후 1980년대에 앤터니 보몬트가 야르나흐가 접근하지 못했던 자료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완성판을 만들었다.[198][110]
생애 마지막 7년 동안 부소니는 자신의 피아노 연주 기법과 교육 철학을 집대성한 ''클라비어위붕'' (Klavierübung) 작업에 몰두했다. 이 작품집은 연습곡, 편곡, 독창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1918년부터 1922년까지 5부로 나뉘어 출판되었고,[199][111] 사후인 1925년에 10권짜리 확장판이 출판되었다.[200][112]
바흐 작품 외에도 부소니는 리스트,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편곡하고 편집하는 작업에도 힘썼다. 특히 리스트 작품 전집 중 3권을 편집했으며, 여기에는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 등이 포함된다.[201][113] 그는 또한 쇤베르크의 피아노 소품 Op. 11 중 2번을 '콘서트 해석' 버전(BV B 97)으로 편곡하기도 했다.[115] 부소니 자신의 작품에서도 다른 작곡가의 음악적 요소를 차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젊은이에게''의 4번째 곡은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11번과 15번을 사용했고,[116] 1920년 작곡된 피아노 소나티나 6번 (Kammerfantasie über Carmen, BV 284)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주제를 기반으로 한다.[117]
3. 4. 신고전주의
부소니는 그의 기념비적인 피아노 협주곡(1904) 완성 이후, 후기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신고전주의 음악으로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 음악의 형식과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적인 음악 어법과 표현을 결합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부소니는 특히 바흐 음악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 이러한 음악적 방향을 구체화했다. 1894년부터 시작된 바흐 건반 음악 편집 작업(바흐-부소니 에디션)은 단순한 악보 교정을 넘어, 연주자의 해석적 자유를 중시하는 부소니의 관점이 반영된 창조적인 재해석을 포함했다.[88][93] 그는 바흐의 오르간 작품들을 피아노로 편곡하면서 원곡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피아노의 표현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택했으며,[91][92] 이는 바흐 음악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시했다. 바흐에 대한 그의 깊은 존경과 창조적 계승 의지는 《J. S. 바흐 이후의 환상곡》(BV 253)이나 《대위법적 환상곡》 같은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95]
동시에 부소니는 동시대의 새로운 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이를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1902년부터 베를린에서 주최한 관현악 콘서트 시리즈에서는 엘가, 드뷔시, 버르토크 등 당시 독일 청중에게는 생소했던 작곡가들의 작품을 독일 초연으로 선보였다.[44][45] 특히 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교류하며 그의 무조 피아노 작품을 자신만의 '콘서트 해석'으로 편곡하고,[115] 쇤베르크의 혁신적인 작품인 《달에 홀린 피에로》의 비공개 초연을 주선하는 등[52] 새로운 음악적 시도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음악적 요소를 융합하려는 부소니의 노력은 그의 후기 작품들, 예를 들어 《엘레지》(BV 249; 1907), 모음곡 《젊은이에게》(BV 252; 1909), 그리고 피아노 소나티나들(BV 257, BV 259 등)에서 성숙한 형태로 나타나며,[43] 20세기 초 신고전주의 음악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4. 저술
부소니는 음악에 관한 여러 에세이를 남겼다. 그의 중요한 저술 중 하나는 1907년에 처음 출판된 ''Entwurf einer neuen Ästhetik der Tonkunst|음악 미학 개요de''이다. 이 책은 부소니가 오랫동안 품어온 신념과 천천히 성숙시킨 생각을 담고 있으며, 그의 연주와 성숙한 작품들의 기본적인 원리를 설명한다.[96] 그는 이 책에서 "예술 작품의 정신은... 세월이 흘러도 가치가 변하지 않지만" 형태, 표현 방식, 창작 당시의 관습 등은 "일시적이며 빠르게 낡아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음악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자유를 얻는 것이 그 운명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96] 음악을 제약하는 관습적인 규칙들을 "입법자"라 부르며 비판했다.[97] 그는 베토벤과 J.S. 바흐의 음악을 음악 정신("Ur-Musik")의 본질로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들의 예술이 "넘을 수 없는 최종성이 아닌 '시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98] 부소니는 해석자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음악의 연주, 즉 그 ''감정적 해석''은 예술 자체가 내려온 자유로운 고도에서 비롯된다... 작곡가의 영감이 표기를 통해 '필연적으로' 잃는 것을 그의 해석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9] 그는 전통적인 12개의 반음 체계를 넘어 미분음악과 같은 새로운 음 체계를 사용하는 미래의 음악을 예견하기도 했다.[100] 그러나 동시에 음악적 형식과 구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젊은 고전주의'는 "확고하고 둥근 형식" 안에서 실험적인 요소들을 통합하고자 했다.[101][102]
부소니의 또 다른 에세이 모음집은 1922년에 ''Von der Einheit der Musik|음악의 통일성d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나중에 ''Wesen und Einheit der Musik|음악의 본질과 통일성de''으로 재출판되었고, 1957년에는 ''The Essence of Music''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었다.[103][104] 이 외에도 부소니는 자신이 작곡한 네 편의 오페라 대본을 직접 쓰기도 했다.[105]
5. 유산
부소니의 음악적 영향은 그의 작곡 자체보다는 그와 함께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제자들과 그의 음악 저술을 통해 더 크게 나타났다고 평가받는다.[206]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브렌델은 부소니의 일부 작품, 예를 들어 다소 과장된 스타일의 피아노 협주곡 같은 곡들이 그의 뛰어난 후기 피아노 음악, 특히 첫 두 개의 소나티나와 1921년 작 토카타의 진가를 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브렌델은 오페라 파우스트 박사가 당대 음악 극장 작품 중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평가했다.[123][206] 음악학자 헬무트 비르트는 부소니가 가진 "전통과 혁신을 조화시키려는 양면적 본성, 작곡가로서의 재능, 그리고 그의 이론적 저술의 깊이"가 그를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로 만든다고 평가했다.[124]
그의 사후 25주년을 기념하여 1949년에는 페루초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가 창설되어 그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125]
부소니의 작품은 생전에 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사 등에서 활발히 출판되었으나, 사후에는 많은 작품이 절판되어 잊히기도 했다. 특히 젊은 시절 여러 출판사와 계약하여 작품 전곡을 모으기 어려웠으나, ラリー・シツキー|래리 시츠키일본어와 같은 연구자들이 피아노 작품 전곡 수집에 힘써 관련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확인된 부소니의 원작은 303곡에 달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일 분단의 영향으로 자필 악보가 흩어져 독일과 폴란드의 야기엘론 대학교 도서관 등에 분산되었고, 상당수가 미출판 상태로 남아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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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Ferruccio Busoni#Opus numb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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